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6세 (문단 편집) == 평가 == 오늘날 루이 16세는 프랑스 대혁명의 뜻에 반해 단두대에서 처형된 군주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론 동정심에 의한 올려치기와 그래봤자 전제군주일 뿐이라는 식의 내려치기가 동시에 이뤄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루이 16세는 다정한 성격이나 오랜 기간 교분을 가지면 알 수 있는 의외의 지성 따위의 면모로 볼 때 폭군은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루이 16세는 구시대가 남긴 숙제를 풀지 못해 희생된 측면도 있지만, 결국 봉건신분제라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대대적인 사회적 개혁의 욕구가 분출되자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군주제를 고수하려 하다 처형당했기에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이다. 물론 루이 16세가 처형당한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견 차이는 근본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가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군주제적 가치관"에서 혁명파는 왕권을 제약하는 [[역적]]이고, 루이 16세가 외국(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루이 16세의 처가집이다. 유럽에서 군주끼리 서로 힘을 빌려주는 일은 흔했다. 처가집의 힘을 빌려서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회복하는 것은 군주제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공화주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죄였다. 사실 이 시기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평민보다는 다른 나라의 군주와 더 가까운 사이'''였다. 서로서로 결혼으로 맺어지거나, 형제 자매끼리 왕위를 나누면서 상당히 가까운 친척 지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친척이다보니 서로 연락도 자주 하고 지내는 사이니까 당연히 더 친밀할 수밖에 없고, 신분과 입장이 완전히 다른 평민과는 달리 '같은 군주'라는 점에서 입장과 신분이 동일하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많았다. 물론 때때로 전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전쟁조차도 '친척들 간의 재산 다툼'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화제]]적 가치관"에서 이 시도는 시민과 그 대표들을 역적으로 몰아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서 죽이려 하는 사악한 적대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루이 16세가 명분을 부여해서 끌고 온 오스트리아 군대가 파리에 입성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역적으로서 살육당할 것이 분명했다. 정치적 가치관과 권력 투쟁을 논하기 전에, 혁명을 지지하는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되었다. 사형 판결이 굉장히 신속하게 결정된 진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실제 이들도 루이 16세가 외국 군대를 끌이들이려 하기 전까진 루이 16세를 죽이자고 주장하진 않았다. 프랑스 백성들은 아직 전통적인 권위와 관습의 영향으로 루이 16세를 "우리들의 왕"으로 여기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선대 국왕인 [[루이 15세]]만큼 개막장도 아니었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해 앙숙인 영국에도 한 방 먹인 터였으며, 가난한 인민들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았으며, 아내가 영국 다음으로 앙숙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지만 '''어쨌든 그리 폭군도 아니고 성격은 착한 왕이니까''' 자코뱅부터 말단 시민까지 그래도 '''살려두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강경한 혁명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왕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시작하는 것은 무리수이니 그냥 [[입헌군주제|헌법만 받아들이게 하고]] 계속 왕 시켜주자는 입장이 대세였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그들의 신뢰를 배신하고 탄압을 시도하려다가 걸린 셈'''이니 학살 목표로 지정되었던 시민들과 대표의 감정이 폭발할 수밖에 없고, 생쥐스트는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라 주장했다. 말하자면 '어떤 논리(군주제, 왕권신수설의 논리)에 따르면 왕이 무죄일 수도 있지만 그 논리에 따르면 혁명은 반역이다. 반면 혁명이 정당하다면 같은 논리에 따라 왕은 유죄다'라는 논리이며, 생쥐스트는 왕이 오스트리아군의 힘을 빌리려 시도한 것 때문에 __왕의 정당성과 혁명의 정당성이 양립할 수 없다__는 이유로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우유부단한 성격인 루이 16세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의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사실 의문스럽지만, 당시 시민들은 "왕의 배신"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물론 루이 16세에게는 파리 시민들보다는 차라리 처남[*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더 친근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런고로 억울한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큰 문제는 루이 16세의 실제 행동 자체도 구시대의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를 심화시키는 짓만 했다는 거다. 예를 들어 국가 수익은 별로인데 쓸데없이 전쟁에 끼어든 걸 그대로 따라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영국 엿먹이는 거 자체가 목적이 될 순 없겠냐 반문할 수 있겠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그리 받아들였지만 정치학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개쪽당하는 건 기분은 좋겠지만 라이벌의 손해가 우리 편의 실익, 득점으로 이어져야지 그게 아니면 그냥 기분만 좋을 뿐이다. 프랑스 입장에서 미국 독립전쟁 개입은 바로 이렇게 기분'''만''' 좋아지고 막상 실익으로 연결된 건 하나도 없었다.] 이걸 끼어들면서 그렇잖아도 적자였던 재정을 더 말아먹었고, 그 망한 재정을 개혁하려고 재무총감인 튀르고나 [[자크 네케르|네케르]]와 같은 인물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기득권의 저항에 번번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똑같이 선대에서 있는대로 말아먹은 [[숭정제]]가 비판받지 않는 이유는 실책이 있긴 했어도 망해가던 [[명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눈물나게 노력했고 실제 성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과세 문제에서 몇 가지 시도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과를 보인 것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해야 할 점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건전한 재정, 즉 <수입의 규모에 맞추어 적절한 수준에서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중세 후반~근세 유럽의 귀족,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미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규모있는 재정 관리와 지출은 시민, 부르주아 계급의 덕목이었고 국왕이나 대귀족에게는 과시적인 소비를 통해 스스로의 권위를 입증하고 과시해 보일 것이 요구되었던 것. 특히 절대왕정기의 국왕에게는 더욱 그러했던 것이,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왕권신수설]]이나 [[절대왕정]]으로 유명한 근세 유럽의 왕권은 실제로는 그리 공고한 것이 아니었기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과시적인 소비나 대외군사활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권위를 과시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재정 규모로 감당하기 힘든 과시적인 소비를 계속할 경우 필연적으로 국가(및 왕실) 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지만 이 문제는 과시적 소비를 통해 강화된 왕권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대의 일반적인 해결책이었다.[* 사실 이 점은 유럽 왕권의 취약함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은 여러 집단들이 난립해 있고 왕가도 귀족 가문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만큼 태생적으로 왕가는 이 집단들을 모두 억누르고 왕가와 귀족은 격이 다르다는 것을 어필하기 힘들었다. 물론 동아시아식 강력한 관료제를 도입하여 전국을 왕이 휘어잡는 체제로 개편하면 그게 가능하긴 한데 유럽은 봉건제적 전통으로 인해 귀족들은 저마다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A국의 귀족 B가 C국에 영지를 가진'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해서 강력한 관료제를 시행하려고 하면 먼저 모든 귀족들의 저항에 부딪히고 외국의 저항도 견뎌야 했기에 도저히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없었다. 즉 사치로 권위를 세우려는 것은 취약한 국가시스템에 기반한 현상인 것. 동아시아의 서진 역시도 귀족과 왕가의 격의 차이가 별로 나지도 않고 관료시스템보다는 귀족의 지지와 왕족들에 의존하여 통치하다 보니 왕권이 약하고 사치로라도 권위를 세우려고 했다. 허나 그 결과는 그나마 모든 나라를 제압할만한 국력을 가진 나라도 없고 가장 센놈을 조지고 보는 탓에 힘의 균형이 대충 맞춰져 나라가 송두리째 망해버리는 건 없던 유럽에 비해 서진은 강한 무력을 가진 이민족들이 있었기에 결국 나라의 절반을 잃고 남은 절반만 건지고 나라를 이어갔다.] 일단 돈이 필요하면 금융업자에게 돈을 빌리든, [[징세청부업자]]에게 징세권을 팔아치워서 일단 땡겨오든 돈을 마련해서 일단 쓰고, 이렇게 진 빚이 위험한 수준까지 쌓이면 돈 갚으라는 금융업자에게 "안 갚을 건데 니가 어쩔 거냐? 왕 배 한번 째 볼 테냐?" 하든지, 교회 재산을 탈탈 털고[* 헌금이나 기부금 등으로 재산이 계속 유입되는 데 비해 성직자들이 결혼하여 자손을 만들지는 못하므로, 상속 등으로 유출되지는 않는 특성상 가톨릭교회에는 필연적으로 재산이 축적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흑역사'로 평가되는 [[방데 전쟁]] 역시 그 원인을 따져 보면 프랑스 혁명정부가 교회 재산과 관련해서 취한 정책들의 실패도 한몫했다는 지적이 있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뒤에도 고질적 재정 부족을 감당할 길이 없기도 했고 종교 권력 역시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상위를 구성하는 집단이었느니만큼 그에 대해 손보려고 한 것인데 그게 부작용을 일으킨 것. 항목 참조.] "[[교황]]님한테 일러서 저 왕 파문시켜 달라고 해보든지 ㅋㅋㅋ 아 그리고 일를 때 [[아비뇽 유수|아직도 아비뇽 대성당 튼튼하게 잘 있다는 것도 같이 알려주고]]"[* 여전히 근대적 중앙집권 권력 자체가 없었던 [[중세]], 특히 교황권의 전성기였던 중세 성기에 이런 일을 벌였다면 "오냐 ㅅㅂ것아 성하한테 꼰질러서 너 [[파문]]먹이고 니 휘하 봉신(봉건제후)들 전부 다 너랑 손절하라고 방송보낼 테니 모가지 씻으면서 대기타고 있든지, 싫으면 [[카노사의 굴욕|알아서 빤스만 입고 대가리 박아라!]]"라는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왜냐하면 봉건제도에서 국왕의 지배력은 제후들의 충성을 '''받아야''' 유지 가능한 것이었기에 파문에 의한 통치명분의 상실은 그만큼 국왕에게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국왕도 대가리 박고 똥꼬쑈하게 만들 수 있는 봉건귀족, 교회 같은 다른 권력집단을 박살내며 성장한 게 17-18세기 유럽의 소위 '절대왕정'이란 체제고, 이 과정의 중심엔 다른 나라 군주도 아니고 바로 루이 16세의 전임자들인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같은 프랑스의 왕들이 있었다. 원랜 유럽 기준에서도 가장 중앙집권화된 왕실 권력이 일찍 출현했고 그 위세도 강력했던 프랑스에서 대혁명과 국왕을 '''죄인'''으로서 '''국가의 이름 아래''' 모가지 자르고 최초의 근대적 국민주권을 법적으로 공표한 공화국이 출현했다는 우연 아닌 우연은 이런 장기적인 역사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교황이라고 무소불위는 아니라서 왕이나 황제가 힘만 있으면 교황도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었다. [[아비뇽 유수]]가 대표적인 사례로 이런 배경을 가지고 프랑스는 신성 로마 제국과 더불어 가톨릭 입장에서 슈퍼을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든지 만만한 귀족을 족쳐서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방법으로 땜빵하여 해결해왔던 것이다. 이 점에서, 종종 '겉보기에만 화려했을 뿐, 실상은 프랑스(왕실)의 내실을 좀먹고 있었다'는 나쁜 평가까지 받는 루이 14세와 루이 15세의 과시적인 사치 역시 정치적으로 의미없는 행위는 아니었다. 루이 14세나 루이 15세가 돈 계산도 못하는 바보라서 국고를 탕진해가며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대외전쟁에 골몰했던 것이 아니라, __호화로운 건축과 과시적인 대외원정을 반복함으로써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 그를 통해 왕권을 강화__했던 것이다. 루이 14세의 경우 이 수법으로 귀족들의 세력까지 제대로 찍어눌렀고, 루이 15세의 경우는 루이 14세보다 정국 통제력이 좀 약한 편이라 귀족들의 세력 확장을 막지는 못했지만 왕권 강화의 끈 자체는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 16세의 차례는 말하자면 선대 2대에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난을 처리할 턴이었던 셈이다. 물론 이 짓거리를 무한정 반복할 수는 없다. 프랑스라는 나라 자체의 역량이 그 루틴을 한 턴 더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변화하는 시대가 그 루틴을 한 번 더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당시 프랑스의 체제가 어떤 한계에 봉착했던 것은 사실이고, 루이 16세에게 주어진 미션이 단순히 '선왕들이 하던 거 한 번 더 해라'보다는 훨씬 어려웠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루이 16세가 그것을 맨몸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무런 선례 없이 해야 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에게 주어진 왕권과 체제는 한계도 명백하지만 충분히 강력하고 활용성 있는 도구였다. 결국 루이 16세의 경우 선대로부터 재정난+빚이라는 막대한 똥더미를 물려받은 처지였기는 하지만, 강화된 왕권이라는 형태로 그 똥을 치울 넉가래도 함께 물려받았던 셈이다. 문제는 루이 16세의 성격이 똥 치우는 일에 영 걸맞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됐다. 세력이 강해진 대귀족들이 왕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곤 하지만, 2대 백 년간 양성된 왕권(특히 군사력)이 어디 간 것도 아니니 정말 작정하고 찍어누른 채 세금을 물리거나 재산을 몰수한다면 정말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려다 [[먼나라 이웃나라]] 프랑스편에도 나온 "하느님도 세금을 내시나?"는 성직자들의 조롱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 이전 시대에서 서유럽의 절대군주들은 돈이 모자라면 교회에 세금을 부여하는 수준을 넘어 교회 재산까지 잘만 몰수했다.[* [[성전 기사단]]이 악마 숭배집단으로 몰려 해산된 것도 기사단이 축적한 재산을 당시 국왕인 [[필리프 4세]]가 노렸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 기사단의 가장 큰 수입원은 바로 유럽 각국에 돈을 빌려주었던 [[금융업]]이었고 이로 인해 성전 기사단은 어마어마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따라서 루이 16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던 <국민국가 개념의 형성>은, 그가 조금만 더 결단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히려 유용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교회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중세 초중기였다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다가 교황과 사이가 틀어지고, 그래서 교황이 쏜 [[파문]]빔 한방 맞을 경우 설령 국왕이라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처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중세 초중기에는 오히려 교황의 권위는 형편없었다. 예시로 [[카노사의 굴욕]]의 주인공 하인리히 4세의 아버지, 하인리히 3세는 10년의 재위기간동안 3명의 교황을 갈아치웠다. 하인리히 4세도 저 사건을 겪인 했지만 끝내 복수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보름스 협약]]으로 교도권이 강해지지만 이건 하인리히 4세의 아들인 하인리히 5세 대의 일이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논지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소위 교황권의 전성기라 하는 중세 성기, 서유럽권에서 교도권과 (군주와 영주들이 가진) 세속권력은 서로 협력적이면서도 동시에 견제하며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관계였던 것이다. 당장 반론 내용에서도 보듯, 하인리히 3세 시절에는 황제에 의해 교황이 연달아 갈아치워질 정도로 세속권력의 우위가 확실했지만 4세 시절에는 서로 한방씩 먹이는데 성공할 정도로 교황권의 성장이 만만찮아졌고, 5세 시기에 이르러서는 숙원하던 사제 서임권을 얻어냄으로써 교황권의 절정으로 한발짝 다가가게 된 것이 중세 성기의 정치적 상황인 것이다. 말하자면 교황은 군주라 해도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빠트릴 수 있을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를 잘못 행사할 경우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속 군주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는 경쟁관계에 있던 것이 중세 교권 전성기의 상황인 것. 이에 비해 루이 16세 시절과 같은 근세 후기에 교회(교황)의 범국가적 영향력이 실추되었다는 것은, 후술된 바와 같이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가진 군주들로써는 교황이 뭐라 하든 그 영향을 이전에 비해 훨씬 덜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제왕들은 더이상 교황의 영향력을 신경쓰고 경쟁할 필요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애초에 해당 '반론' 자체가 '중세 교황권 전성기에는 왕이건 황제건 모두 교황 앞에서는 벌벌 떨었다'식의 잘못된 이해에 대해서나 유효한 반론이지, 중세에 비해서도 더 실추된 근세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에 대한 반론으로는 부적절하다.] 그래도 국민국가 개념이 어느 정도 형성된 근세 절대왕정기의 프랑스 국왕이라면 설령 파문을 당하더라도 데미지 컨트롤이 훨씬 용이했다. 당장 또한 탈기독교(특히 탈[[가톨릭]])적 경향이 강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그 영향력을 이용했다면 교회나 대귀족과 척지게 되더라도 정국 장악력을 유지하기가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 과세에 대해 교황에게 압박당할 경우 "교황이 뭔데 프랑스 국내 문제에 참견해서 프랑스 왕을 협박하냐!"는 국내 여론을 이끌어내어 교황의 압박을 버티기 쉬웠을 것이다.].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 창설만 보더라도 권력을 장악한 국왕이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자국 교회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헨리 8세에게 영국 국교회 창설을 뒷받침해줄 [[종교개혁]] 세력이 있었다면 루이 16세에게도 계몽주의 지식인들과 갈리아교회주의[* Gallicanism. 쉽게 말해서 '''프랑스의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왕권이 교권보다 우선한다'''는 사고 방식이다.]가 있었다. 물론 이쪽으로 따지면 프랑스의 경우 영국이나 [[북유럽]]보다 [[가톨릭]]의 교세가 크고 영향력도 강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영국처럼 멀리 외국의 경우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루이 16세의 내조부인 [[루이 13세]][* 루이 16세의 현조부인 [[루이 14세]]의 아버지다. 루이 14세는 증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정도로 오래 산 걸로 유명하고 루이 15세도 당시 기준으론 상당히 장수해서 그런지, 루이 14세와 루이 16세 사이의 왕은 루이 15세 단 한명 뿐인데 항렬은 5세대를 넘어간다.] 시절 프랑스가 중세 내내 '가톨릭교회의 장녀' 운운하던 시절은 하루아침에 갔다버렸던양 지극히 세속적인 지정학적 논리에 따라 [[30년 전쟁]] 당시 범개신교편에 서며, 신학적으로도 왕실이 [[장 보댕]] 같은 교권위 왕권 우위론을 설파한 정치학자, 얀센주의 같은 '이단'시비까지 있는 신학적 트렌드를 밀어준 전례까지 있다. 이 전시대인 16~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의 왕실 권력의 독점적인 성장에 여전히 생생히 반발하는 귀족, 성직 권력들도 힘을 합쳐 [[위그노]] 반란, 프롱드의 난 같은 정치적인 도전할 힘이라도 있었지만 18세기 프랑스는 그런거 이미 다 때려잡은지 오래였다. 가톨릭교회 역시 [[종교개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오히려 프랑스, 스페인 같은 강력한 세속 왕실 권력에 더 의존적으로 변했다는 시대적 상황까지 고려하면 교회 전체 입장에선 핵심 [[가톨릭]] 국가 중 하나인 프랑스를 잃는 것까지는 도저히 감수할 수 없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심지어 이전까진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이베리아]] 세력들 전담 특기였던 유럽 외 세계선교마저도 슬슬 하나둘씩 프랑스발 선교회, [[선교사]]들이 꿰차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따라서 루이 16세가 교회 과세 정책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면 끝까지 저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대귀족과 교회의 반항을 제압하지 못하여(=세금을 물리지 못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시민+지식인 세력[* 유럽의 많은 절대왕정기 군주들은 시민+지식인 세력을 '''양성하여''' 대귀족과 교회의 세력을 억제했다.]이 주축이 된 혁명으로 인해 몰락했다. 연 세입의 60%가 이자 갚는데 들어갔다는 것 역시 당시 프랑스 국왕이 빛 못갚겠다고 디폴트를 선언해 버리면 변제를 강요할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루이 16세 특유의 선량하고 온화, 또는 우유부단한 성격상 저런 강경책을 쓰지 못했기에 확실한 돈줄을 내버려두고 과세 문제 정도나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으며, 그나마도 재정상황을 확실히 개선할만큼 강력한 개선책은 대상 집단의 반발때문에 쓰지도 못하고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분명 선대로부터 크나큰 난관을 물려받은 처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안타깝다기보다는 하려면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성격이나 적성에는 영 걸맞지 않은 입장을 요구받았고, 이 때문에 몰락했다는 점에선 안타까운 인물인 셈이다. 그래도 인간적인 면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루이는 왕위 계승 순위에서 멀었으나 왕태자였던 아버지와 맏형인 왕태손이 [[결핵]]으로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인 루이 15세보다 일찍 죽자 왕태자가 된 것이었고, 본인 스스로도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루이 15세 역시 왕이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즉위했고, 리더쉽 부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는 점에서 16세와 비슷한 케이스이기는 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기된 내용에서는 <루이 16세의 치세는 이전 2대동안 강화된 왕권으로 그 부산물인 재정문제를 처리할 턴>이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루이 15세 시기가 재정문제를 처리할 최적의 턴이었다고 볼 여지도 크다. 루이 14세 시기에 강화된 왕권으로 15세 시기에 재정문제를 처리해 버렸으면 16세의 치세는 훨씬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루이 15세 역시 재정문제를 처리하기에는 영 걸맞지 않은 성격이었고, 이 때문에 자기 턴에 부여받은 필수 미션을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둔 상태에서 턴 종료를 눌러버린 것이다. 결국 이 필수 달성과제는 루이 16세의 턴으로 그대로 넘어왔고, 따라서 루이 16세는 15세 당시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14세 시대에 이미 파탄에 이른 재정이 15세 시대에 더 망가졌으며, 14세 시대에 확 찍어눌러두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15세 시기에 어느 정도 다시 확대되었다.)에서 이 필수미션을 수행하지 못하여 게임 오버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왕이 된 것을 알았을 때는 두려움과 중압감에 아내와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이쪽도 '''전제군주제의 엄연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신이 군주제를 증오하던 시민들에게 처형되었지만 국왕의 지위는 시대상 그에게 너무나 과분하였다. 차라리 평범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학식이 깊고 기술자에다가 검소하고 소박한 사람으로 존경받았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